역대급 ‘의대 광풍’에 과학고·영재고·KAIST 이탈자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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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4년간 영재학교·과학고 떠난 학생 총 303명
KAIST, 지난해 모집 정원의 15.7%인 130명 자퇴
안정적이고 고연봉 보장되는 의사 선호 두드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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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영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년간 300명이 넘는 영재학교와 과학고 학생들이 중도 이탈했고 이공계특성화대에 진학했다가 의대 진학을 위해 자퇴하는 학생도 증가했다. 최근 전 세계가 반도체·AI(인공지능)·우주 등 차세대 첨단산업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반면에 한국에선 우수 인재가 의대에만 쏠리는 현상이 심화하면서 결국 국가경쟁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의대 진학 시 페널티, 영재학교·과학고 자퇴 이어져

9일 학교 알리미 공시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 7개 영재학교(한국과학영재학교 제외)에서 전출하거나 학업을 중단한 학생은 총 60명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전국 20개 과학고의 전출·학업 중단 학생은 243명으로 집계됐다. 4년간 총 303명이 영재학교와 과학고를 떠난 것이다. 연도별로 보면 2020년 79명, 2021년 83명, 2022년 75명, 2023년 66명으로 매년 70명 안팎의 이탈자가 발생했다. 직전 4년인 2016~2019년과 비교하면 4년 새 37.8%가 늘어났다.

영재학교·과학고를 다니다 그만둔 학생이 늘어난 주요 원인으로는 재학생에게 의대 진학 불이익이 강화된 점이 꼽힌다. 그동안 영재학교·과학고는 졸업 후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에 대해 ‘과학기술 인재 양성’이라는 설립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불이익을 강화해 왔다. 2018년에는 일부 영재학교가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회수하고 추천서를 작성하지 않는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특히 2022학년도부터 이 조치가 더욱 강화되면서 전국 영재학교와 과학고 입학생은 의대 진학 제재 방안에 동의한다고 서약해야만 학교에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의약학 계열 진학을 희망하면 진로·진학 지도도 받을 수 없게 됐다. 의대에 진학하려는 영재학교 학생은 교육비와 장학금을 반납하는 한편 일반고 전출을 권고받고, 학교생활기록부에도 학교 밖 교육·연구 활동을 기재할 수 없도록 했다. 과학고 역시 의대에 진학하면 졸업 때 수상이나 장학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을 받는다. 의약학 계열에 진학하려면 영재학교와 과학고 재학기간 중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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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등 이공계특성화대학도 중도 탈락생 늘어

이런 불이익을 피하고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이공계특성화대학을 징검다리로 삼는 학생도 늘고 있다. KAIST에 따르면 지난해 자퇴와 미복학 등으로 인한 중도 탈락 학생은 130명이다. 이는 2024학년도 모집 정원 대비 15.7%에 해당하는 규모다. 2019년 이후 5년간 중도 탈락한 학생도 576명에 이른다.

의대 진학을 위해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는 경향은 다른 이공계특성화대학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2년 KAIST를 포함해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 4대 이공계특성화대학의 중도 탈락생은 268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187명) 대비 43.3%나 증가한 수치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중도 탈락생은 908명에 이른다. 학교별로는 UNIST 66명, DGIST 29명, GIST 48명으로 집계됐다. 이들 외에 이공계 특성화 대학으로 분류되는 포항공과대학교(POSTECH)와 한국에너지공과대의 경우 각각 36명, 7명의 중도 탈락생이 발생했다.

이른바 SKY 대학(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2022년 SKY 대학의 중도 탈락생 수는 2,131명으로, 5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등록 포기자도 증가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3학년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정시 모집의 최초 합격자 등록 현황을 집계한 결과 총 1,343명이 등록을 포기했다. 2019학년도부터 2023학년도까지 최근 5년 새 가장 많은 숫자다. 세 대학의 정시 합격 등록 포기자는 2019학년도 1,062명, 2020학년도 1,047명, 2021학년도 900명, 2022학년도에는 1,301명이었다.

의대 가려고 재수 선택, 의대 진학생 중 77%가 ‘N수생’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N수생’도 늘어났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수능 응시생은 50만4,588명으로 전년 대비 0.7% 감소했다. N수생이 늘어나면서 전체 학령인구의 감소세에 반해 수능 응시생 규모는 예년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해 원서를 접수한 재학생은 32만6,646명으로 전년 대비 2만3,593명 감소했지만, 졸업생과 검정고시생은 각각 1만7,439명, 2,712명 늘어났다. 종로학원에 의하면 지난해 전체 응시생 중 N수생 비율은 35.3%로 1996학년도 수능이 기록한 37.3% 이후 28년 만에 최고치였다. N수생은 의대 정시 합격생 중에서도 77%의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의대 선호는 과거부터 있었지만, 최근에는 의대 정원 증원과 맞물려 ‘광풍’으로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 서울 대치동, 목동 등 유명 학원가에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의대 선호의 배경에는 안정적인 고연봉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성향과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명문대를 졸업하더라도 대기업이나 공기업 취업이 쉽지 않은 데다 이마저도 평생직장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높은 연봉과 함께 노후까지도 일할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등의 여파로 과학자 우대 풍토 및 혜택까지 사라지면서 의대 선호 현상을 더욱 심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의 의사 소득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7월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통계 2023’에 따르면, 국내 병의원에서 월급을 받는 의사의 연간 임금 소득은 평균 19만2,749달러(약 2억6,500만원)로 집계됐다. 관련 통계를 제출한 28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이에 전문가들은 사회의 인센티브 체계가 왜곡되면서 유능한 인재가 한 곳에 쏠리는 의대 광풍 현상이 결국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이 될 것이란 우려를 내놓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인재 쏠림 현상은 머지않아 한국이 겪게 될 만성적인 성장 정체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의료분야를 포함해 한국 사회의 인재가 가야 할 여러 분야 간의 인센티브 체계가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 파악하고 의대 정원 조정으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정책 방안이 동시에 강구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