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부 지원 아래 ‘기술 추월’ 시작한 마이크론, 한국 위주 HBM 시장에 지각변동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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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HBM 경쟁력 제고 본격화, 미 정부도 마이크론 '밀어 주기'
HBM 선두 점했던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추격 아래 '지각변동' 가능성
인력 유출 문제도 심각, "유출 사전 차단 방책 사실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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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론사의 HBME 메모리 홍보용 이미지/사진=마이크론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마이크론)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물리치고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지개 켜기에 나섰다. 물론 국내 업체가 그간 이뤄 온 성과를 단기간에 무너뜨리진 못할 거란 것이 업계의 대체적인 시선이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는 견해도 나온다. 마이크론이 국내 HBM 대비 성능이 앞선 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바 있는 데다, 미 정부가 마이크론을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HBM 선점 노리는 마이크론, 전력 성능서 강점 보이기도

3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마이크론이 준비 중인 차세대 HBM은 전력 소모량 측면에서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 등 국내 업체 대비 우위에 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을 조합한 AI 반도체에 있어선 저전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저전력을 구현해야 막대한 데이터센터 비용을 절약할 수 있고, 발열 문제도 해결될 수 있어서다.

마이크론의 차세대 HBM은 ‘HBM3E 12단’으로 추정된다. D램 셀을 12단으로 수직 적층한 것으로, 업계 사상 처음 상용화가 시도되는 제품이다. 마이크론 차세대 HBM 출시 소식에 시장의 기대도 커지는 모양새다. 이전 제품 역시 전력 측면에서 강점을 보인 바 있기 때문이다.

실제 마이크론은 앞서 지난 2월 공개한 HBM3E 8단에서도 경쟁사 대비 30% 전력 효율이 우수한 제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에 힘입어 세계 최대 AI 반도체 업체인 엔비디아 공급에도 성공했다. 현 상태가 유지될 경우 차세대 HBM 시장에서 업계 주도권을 잡는 기업은 마이크론이 될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예상보다 빠른 성장세 보인 마이크론, ‘한국 업체 위주’ 시장 타파하나

마이크론이 HBM에 힘을 싣는 건 HBM의 시장 성장 폭이 크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글로벌 HBM 시장이 2023년 11억 달러(약1조4,600억원)에서 2027년 51억7,000만 달러(약 7조1,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으며, 일각에선 전망치보다도 최대 3~5배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HBM이 일반 D램보다 영업이익이 훨씬 높은 데다 아직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인 만큼 성장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란 시선에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 간 HBM 경쟁에도 물이 올랐다. 국내 기업의 영향력도 커졌다. SK하이닉스를 선두로 그 뒤를 삼성전자가 따라가는 모양새가 거듭 연출되면서 HBM 시장 대부분이 국내 시장의 영향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실제 SK하이닉스는 지난 2월 마이크론이 내놓은 HBM3E 8단 제품을 이미 지난해 8월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기존 공정을 통해 이미 16단 제품 개발까지 성공한 상황이다.

삼성전자 역시 마이크론이 8단 제품을 내놓은 시기 업계 최대 용량인 36GB HBM3E 12단 적층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쌓아 올린 성과를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마이크론의 성장세가 시장의 예상보다 더 빠르단 점이다. 마이크론은 우선 현재 시장에서 가장 앞선 제품인 4세대 HBM3를 건너뛰고 곧바로 5세대 HBM3E 양산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약점으로 지목됐던 생산능력(CAPA)도 빠르게 늘렸다.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론의 HBM 생산능력은 올 연말 기준 12인치 웨이퍼 2만 장에 달한다. 아직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생산능력의 20% 정도지만, 내년께 생산능력이 3~4배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안심해선 안 된다.

엔비디아를 고객사로 확보한 이후론 대규모 설비 투자도 진행했다. 마이크론은 올해 연간 시설투자 계획을 기존 75억 달러에서 최근 80억 달러(약 11조원)으로 상향했다. 아울러 미국 뉴욕주와 아이다호주에 신규 공장도 건설 중이다. HBM 시장 선점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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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론 밀어 주기 나선 미 정부, 인력 유출 움직임도

마이크론이 단기간 성장을 전략으로 삼을 수 있었던 건 자국 중심 반도체 지원 정책을 쏟아내는 미 정부의 덕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마이크론 투자액의 상당 부분은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으로 충당됐다.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미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 따라 지난 4월 61억 달러(약 8조3,70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받았는데, 이는 인텔·TSMC·삼성전자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다.

최근엔 미 정부가 엔비디아의 입지를 본격 활용할 수 있단 의견도 나온다. 엔비디아를 마이크론의 중심 동력으로 삼아 자국 반도체 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단 것이다. 엔비디아는 HBM 시장 최대 고객이자 AI 반도체 시장의 큰손으로 꼽히는 기업이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HBM 공급을 위해 엔비디아 측에 샘플 단계를 면밀히 거쳐야 하는 반면 미국 기업인 마이크론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엔비디아 공급망에 들어갈 수 있다”며 “마이크론의 기술력이나 생산능력이 국내 기업 대비 한참 떨어지더라도 (마이크론이) 빠르게 추격에 나설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미국 차원의 인력 유출이 점차 심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인력 유출은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 SK하이닉스 전 연구원이 마이크론 임원으로 이직하면서 사실상 기술 유출이 발생한 게 대표적이다.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에서 D램과 HBM 설계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A씨는 2022년 7월 SK하이닉스에서 퇴사한 뒤 마이크론에 임원급으로 이직했다. A씨는 SK하이닉스 퇴직 당시 마이크론을 비롯한 경쟁업체에 2년간 취업하거나 용역·자문·고문 계약 등을 맺지 않는다는 내용의 약정서도 작성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사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재판장 김상훈)는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가운데 A씨가 SK하이닉스에서 근무하며 얻은 정보가 경쟁사인 마이크론으로 흘러갈 경우 SK하이닉스의 경쟁력 훼손이 불가피하다”며 SK하이닉스가 A씨를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업계는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각의 불안은 여전하다. 법원의 판결은 사후처분일뿐, 실질적으로 기술 유출을 사전 차단할 방책은 없다시피 한 것 아니냐는 시선에서다. 미 정부의 밀어 주기가 노골적으로 반복되는 가운데 인력 유출 가능성이 거듭 점쳐지는 만큼 사전 대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