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반도체 회사 ARM, 매각 실패하고 나스닥 상장한다

기업 매각 제한되자 IPO로 출구 전략 급선회한 손정의 현금난 시달리는 손정의, 2021년 17조원 규모 순손실 기록한 비전펀드 상장되면 주요 반도체 업체들 지분 확보 경쟁 뒤따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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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끄는 영국의 반도체 설계업체 ARM이 이르면 올 가을 나스닥에 상장할 예정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ARM의 모회사인 소프트뱅크와 나스닥 거래소가 11월 10일에 ARM을 상장하기로 잠정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손 회장은 이번 주에 공식적으로 상장을 승인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본사를 둔 반도체 설계 회사인 ARM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팹리스 중의 팹리스’로 알려진 ARM은 전 세계 스마트폰에 탑재된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90%, 태블릿에 탑재된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의 85%를 설계한다. 삼성전자, 퀄컴, 애플과 같은 유명 고객사에게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ARM은 또한 AI 개발을 위한 AI 반도체 및 서버 반도체 설계의 최고 공급업체이기도 하다.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9월 미국 칩 제조업체 엔비디아에 최대 400억 달러(52조원)에 ARM을 매각하려 했지만 각국 규제 당국의 반대로 거래가 무산됐고, 이후 인텔, 퀄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ARM의 잠재적 인수자로 거론돼 왔다. 한편 ARM은 미국과 영국 거래소 동시 상장을 고민하며 수개월 동안 영국 금융감독청(FCA)을 비롯한 영국 정부와 협의해 왔는데, 리시 수낵 영국 총리까지 이를 요청했지만 손 회장은 미국 거래소의 투자자 기반이 더 탄탄하고 기업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결국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국 단독 상장을 택했다고 한다.

손정의의 오판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는 2016년 7월 314억 달러에 ARM을 인수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기업으로는 최대 규모의 인수였다. 손 회장은 바둑을 두는 것처럼 50수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역설하며 이 인수를 “기회를 잡기 위한 내 인생 최대의 베팅”이자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설명했다. 소프트뱅크의 인수에 대해 통신 회사가 반도체 설계 회사를 인수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손 회장은 ARM의 프로세서가 스마트폰뿐 아니라 자동차, 가전제품, 게임기 등 다양한 제품에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30년까지 전 세계에 1조 개의 ARM AI 칩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ARM이 이러한 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ARM의 기업가치는 300억 달러에서 700억 달러 사이로 추정되며, 전문가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다음 달 발표될 소프트뱅크의 실적은 2년 연속 적자일 것으로 입을 모은다. ARM의 성공적인 상장은 소프트뱅크의 턴어라운드에 필수라는 의미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일본 소프트뱅크가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 잔여 지분을 대부분 매각하기도 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기술 투자 가치가 하락하는 가운데 지분 매각을 통해 현금을 조달하기로 한 것이다. 12일(현지 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소프트뱅크가 올해 들어 72억 달러(약 9조5,000억원)어치의 알리바바 주식을 매각했다고 밝혔다.

작년 340억 달러(약 45조원)가량 매각한 데 이어 올해도 대량 매도에 나선 모습이다. 이로써 소프트뱅크의 알리바바 지분율은 3.8%로 낮아지게 됐다. 알리바바 매각은 이전에 실패한 비전펀드 투자로 인한 손실을 상쇄하기 위해 자금을 조달하려는 시도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소프트뱅크는 작년 2분기에만 3조 1,620억 엔(30조5,00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으며, 손실 대부분은 비전 펀드에서 발생했다. 비전 펀드의 주요 후원자인 중동 투자자들의 자금이 고갈되면서 소프트뱅크의 현금 부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소프트뱅크의 알리바바 매각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날 알리바바의 주가는 5.93%나 급락하기도 했다.

실현되지 못한 ARM과 엔비디아의 거래

2020년 9월 엔비디아는 400억 달러 규모의 ARM 인수를 발표했는데, 이는 금세기 가장 중요한 M&A가 될 수 있었지만 주요 칩 제조업체와 글로벌 규제 당국이 ‘중립성 훼손’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2022년 2월 거래가 결렬되었다. 엔비디아는 ARM의 많은 고객과 경쟁하고 있어 ARM의 라이선스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또한 엔비디아가 ARM의 설계 수수료를 인상하거나 특정 회사에 대한 설계 제공을 중단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여러 국가의 규제 당국은 ‘반독점’을 이유로 엔비디아와의 합병을 승인하지 않았다.

소프트뱅크는 엔비디아로의 매각이 무산되자 기업공개(IPO)로 출구 전략을 변경했다. 비전펀드 손실로 2021년 17조원의 순손실을 기록한 소프트뱅크는 자금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IPO가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ARM의 IPO가 탄력을 받으면서 퀄컴(QCOM),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인텔(INTC) 등 주요 반도체 업체들이 지분 확보를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ARM의 IPO는 모바일 AP 시장에서의 지배력뿐만 아니라 기술 차별화, 시스템 구성 환경 변화, 주요 고객사 로드맵 등 성장 잠재력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300억에서 700억을 오가는 기업가치가 IPO를 통해 신주가 발행되고 기존 주식이 매각되고 나면 얼마나 달라질지도 기대되는 부분이다.

ARM에게 불어닥칠 IPO 후폭풍

ARM의 현재 기업가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회사가 왜 굳이 매각을 시도했는지, 왜 IPO를 최대한 늦추려고 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ARM은 현재 상장하기보다는 기업가치가 낮아지더라도 매각하는 게 더 나은 상황이다. 기업을 매각할 경우 매각 금액은 판매자에게 바로 들어오는 수익이 되지만, 상장하게 되면 대중이 구매할 수 있는 주식을 더 많이 발행해야 하므로 회사 가치는 상승하지만 판매자의 수익은 저하되기 때문이다. 현금 확보가 절실한 소프트뱅크로서는 매각을 우선시할만했다. 게다가 기업공개는 조사 강화, 투자자 관계 요구, 회사 정보 공개 필요성 등 ARM에 여러 가지 과제를 안겨준다. 반도체 설계 회사인 ARM은 독점 기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민감한 정보가 공개될 경우 기업가치가 크게 훼손된다. 기업공개 덕분에 ARM은 자금을 조달하고 엔비디아로의 매각 실패를 극복할 기회를 얻겠지만, 이제 상장 기업으로써 해결해야 할 여러 복잡한 문제도 마주해야만 한다.

기업이 상장하면 다양한 도전과 번거로움에 직면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주가 하락 시에는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인건비를 관리해야 하는 IR팀에 대한 압박이 커질 수 있다. 기업 상장 후엔 주주총회와 이사회에서 공시 요건도 충족해야 한다. 이는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독점 정보에 의존하는 기술 기업에게는 특히 어려운 조건이다. 일례로 삼성은 국회에서 엣지 디스플레이 기술을 공개하라는 압박을 받기도 했는데, 결국 중국의 경쟁업체에 기술이 넘어가며 기술적 이점을 잃었다.

마찬가지로 반도체 설계 회사인 ARM도 공적 지위에 따르는 의무로 인해 민감한 정보를 공개해야 할 경우 기술적 경쟁 우위를 잃을 위험이 있다. 이것이 ARM이 상장을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였으며, 회사를 매각하는 것이 더 매력적인 옵션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장에 뒤따르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ARM은 구매자를 찾을 수가 없었고 현금이 급한 손정의 회장으로서는 결국 IPO를 추진하게 됐다. 소프트뱅크가 ARM을 엔비디아에 400억 달러에 매각하려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상응하는 제안을 내놓은 기업도 없다. 따라서 ARM은 운영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IPO를 진행할 수밖에 없게 됐다. 손정의 회장으로서는 계속해서 아픈 선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꿎은 ARM의 앞날은?

손정의 회장의 미래 구상에 반드시 필요했던 ARM이 매물이 되고 상장으로까지 몰리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손 회장의 미래 예측이 실패해서다. 소프트뱅크는 비전펀드를 통해 그동안 장래성 높은 기업에 투자해왔는데 그게 문제가 됐다. 위워크 등 거액을 투자한 기업이 실패하면서 막대한 재정 부담을 떠안았다. 2020년 1분기 기준 소프트뱅크의 적자 규모는 약 16조5,000억원에 육박한다. 당장 현금 유동성 확보에 나서기로 하면서 ARM과 알리바바의 매각이 시작된 셈이다. 어찌 됐든 ARM의 나스닥 상장에 대한 잠정적인 합의는 소프트뱅크와 ARM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엔비디아로의 매각이 무산되고 소프트뱅크가 일련의 손실을 만회해야 하는 상황에서 ARM의 IPO는 회사와 모회사 모두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애꿎게 팔려나가는 신세지만 ARM이 상장을 준비하면서 기업가치, 성장 잠재력, 상장 기업으로서의 운영 과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미래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요 반도체 회사들이 ARM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IPO의 결과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IPO 추진과 기업공개에 따른 장단점을 ARM이 신중하게 검토해야 했지만 모회사의 자금 압박에 의해 과정이 다소 성급하게 진행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IPO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면 절실히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ARM은 앞으로 강화된 조사, 투자자 관계 요구, 공개 요건 등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