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日 반도체 르네상스 ② 일본으로 모이는 세계의 반도체 기업들

DX, 지정학·경제안보, 탄소중립화·GX를 꿰는 일본 정부 간판 정책은 ‘반도체’ 일, 미국과 반도체 동맹 강화, 새 공장 유치에 투자금 쏟는다 일본 정부 “지정학적 리스크에 새 투자처로서 일본의 매력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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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희망을 바탕으로 일본은 반도체 분야에서 유례없던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일본 기업만을 육성’하던 기존의 배타성에서 벗어나 해외 반도체 기업들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일본이 상당한 보조금을 타진한 덕분에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한국), TSMC(대만), 인텔(미국) 등은 일본에 생산 기지와 R&D 센터를 설립할 수 있게 됐다.

반도체의 미래를 위한 적극적 투자

지난 5월 18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삼성전자 △TSMC △인텔 △IBM △마이크론 △에어플레인 머티리얼즈 등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7곳의 대표와 최고 경영진을 초청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세계 주요 반도체 대기업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례적”이라며 “기시다 총리는 각 기업 대표에게 보조금 지급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대일 투자를 확대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이 중 마이크론이 가장 먼저 기시다 총리에게 응답해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2025년까지 일본에 5천억 엔(약 4조8,000억원)을 투자해 히로시마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초미세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차세대 메모리 칩을 생산하기 위해 네덜란드 ASML의 최첨단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도 도입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2천억 엔(약 1조9,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삼성전자와 인텔, TSMC도 유사한 계획을 내놨다. 삼성전자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 300억 엔(약 2,858억원)을 투자해 3D 반도체 시제품 라인을 포함한 R&D 시설을 건설할 계획을 밝혔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100억 엔(약 953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인텔은 일본 반도체 소재·장비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TSMC는 일본에 두 번째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계획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금 4,760억 엔(약 4조5,336억원)을 받았다. 모두 과거 일본에서 볼 수 없었던 외국 기업에 대한 파격 지원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운데)와 아마리 아키라 자유민주당 간사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사진=일본 총리실

일본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

반도체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는 일본-대만 경제 협력을 주창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생전 최우선 과제였다. 2020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2021년 봄, 대만에 집중한 것은 일본 반도체 산업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힌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2030년까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던 산업을 소생시키려는 필사적인 시도가 시작된 것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에 2021년 5월 ‘일본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이 설립되면서 반도체 패권을 탈환하려는 노력이 공식화됐다. 아베 전 총리를 특별 고문으로 하는 이 단체는 국회의원 100명이라는 규모도 엄청나지만, 오직 자민당 의원들로만 이뤄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국회 의석 과반수를 가진 자민당이 반도체 전략을 속전속결로 결정해 치고 나가기 위한 정치조직인 것이다.

당시에 일본 정부는 반도체 전략을 발표하며 신규 반도체 생산 공장에 2조 엔(약 18조원)을 지원하고 2030년까지 일본의 반도체 매출을 15조 엔(약 136조원)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1년 뒤인 2022년 5월에는 미일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반도체 협력을 위한 기본 원칙에 합의했고, 이후 벨기에 루벤에 위치한 세계 최고 나노 소자 반도체 연구기관인 IMEC(Inter-university Micro Electronics Center)과 IBM이 일본에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미국과 EU가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인정하고 손을 보탠다는 의미였다.

일본의 반도체 부흥을 위한 로드맵

현재 일본 반도체 시장은 그야말로 세계 시장의 축소판이다. TSMC와 같은 파운드리부터 마이크론, 삼성전자, 인텔과 같은 DRAM 및 후처리·패키징 기업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각 분야의 최고 기업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이미 생산 중인 낸드 플래시(키옥시아), 차량용 반도체(르네사스)까지 포함하면 반도체 전 분야를 커버하게 된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산업 부활 계획이 현재까지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시장은 회로 선폭에 따라 크게 최첨단 반도체(2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12~28나노), 범용 반도체(40나노 이상)로 분류된다. 현재 일본의 반도체 기술은 40나노급 범용 반도체에 머물러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첨단 반도체(12~28나노미터) 생산 능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TSMC를 구마모토에 유치했다고 설명한다. 일본 정부와 도요타 자동차, 소니 등 주요 기업이 합작 투자한 라피더스가 첨단 반도체 기술 확보라는 마지막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라피더스가 미국 IBM과 손잡고 2027년까지 2나노미터 반도체 생산에 성공한다면 일본은 다시 한번 반도체 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떨치게 된다는 복안이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 산업의 글로벌화에도 주력하고 있다. 정부 산하 펀드인 일본투자공사는 적대적 인수합병으로 해외에 매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계 최고의 포토레지스트 제조업체인 JSR을 약 1조 엔에 인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세계 5대 포토레지스트 기업 가운데 네 곳이 일본 기업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JSR이 △도쿄응화공업 △신에쓰화학공업 △후지필름 등 일본계 기업 3곳을 인수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인수가 성사되면 시장 점유율이 72%까지 올라간다.

지금까지 비어있던 첨단 반도체와 최첨단 반도체는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거나 자국 기업을 신설해서 채우고, 강력한 경쟁력을 자랑하는 반도체 소재 사업은 업계를 통합해 더욱 강하게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결국 일본 반도체 부흥의 ‘화룡점정’은 라피더스다. 현재까지는 일본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 재편이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물론 미국과 EU의 전폭적인 지원이 라피더스, 더 나아가 일본 반도체 산업을 부활을 도울 수 있지만 속단은 이르다.